우리시대의 큰 어른입니다.
윤여준(83)의 삶과 세계관 그리고 철학을 보면
그분의 인생은 우리 한국의 발자취와 같다.
[삶] 윤여준 "김영삼, 노태우 대통령에 '내 손에 죽고 싶으냐' 폭언"
송고시간2023-03-31 06:00
"이재명 연내 당대표 그만두면 민주당 비대위 꾸려 혁신 추진할 듯"
"국민의힘 공천개혁 실패로 총선 패배하면 정부는 아무것도 못 해"
[촬영 이건희]
(서울=연합뉴스) 윤근영 선임기자 = 윤여준(83)은 정치에 대해 날카로운 비평을 해왔고, 팔순을 넘긴 지금도 여전하다.
평생 중도적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볼 수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를 이달 27일 서울 종로구 연합뉴스에서 만났다.
윤여준은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늦어도 올해 연말 안에는 대표직에서 사퇴할 것이라고 했다. 그 직후에 민주당은 비상대책위원회를 발족해서 혁신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의힘은 내년 총선에서 참신하고 개혁적인 공천을 하지 못해 표를 충분히 얻지 못하면 윤석열 정부가 레임덕에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했다. 윤여준은 김영삼 대통령이 민자당 대표 시절 당시 대통령이었던 노태우에게 찾아가 "내 손에 죽고 싶으냐"는 폭언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전했다.
충남 논산에서 태어난 윤여준은 경기중학교를 졸업한 뒤 경기고등학교 중퇴를 거쳐 단국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동아일보·경향신문 기자, 김영삼 대통령 공보수석, 환경부 장관, 비례대표 국회의원, 여의도연구소장 등을 지냈다.
[본인 제공]
-- 어떤 집안에서 자랐나.
▲ 할아버지는 논산의 대지주였다. 기와집이 넉줄로 있었고, 사랑채 마당과 안채 마당이 따로 있었다. 나는 8남매 중 장손이었다. 내가 태어난 직후에는 방에 병풍을 쳐놓았고, 가족이 아닌 사람이 나를 보려면 할아버지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고 한다. 나는 (장손이어서) 생후 6개월간 방밖에 나갈 수가 없었다. 방 밖으로 나왔을 때는 햇빛 때문에 눈을 뜨지 못했다고 한다.
-- 땅이 어느 정도 많았나.
▲ 정확하게 기억할 수 없지만 논이 몇백마지기는 됐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소작을 주지 않고 사람을 사서 직접 벼농사를 지었다. 집안에 머슴도 여러 명이 있었다. 한약 약장이 있어서 한약재를 구입하고 관리하는 사람을 별도로 뒀다. 봄철에는 마당에 큰 가마솥을 걸어놓고 죽을 끓여서 가난한 집에 나눠줬다. 마을에 설사병이 돌면 한약재를 끓여 제공했다. 땅은 해방 후 토지개혁 때 주민들에게 나눠줬다. 아버지는 진보적인 분이어서 "농토는 농사짓는 사람의 것이어야 한다"며 농토를 기꺼이 내놓으셨다.
-- 아버지가 젊은 시절에 독립운동 하는 사람들을 도왔나.
▲ 아버지는 고향에서 한학을 공부하시다 할아버지 몰래 서울로 도망을 갔다고 한다. 세상은 바뀌고 있는데, 한학만 공부해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서울에서 독립운동하는 분들의 문하생이 돼서 심부름도 하고 공부도 했다. 위당 정인보 선생이 아버지의 스승이었다. 아버지는 해방 전에 일제의 탄압을 못 견디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위당 선생도 지방으로 내려왔는데, 아버지가 논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집을 지어 그분과 그 가족들을 모셨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 아버지가 이승만 대통령의 비서 겸 총무처 차관이었다고 하던데.
▲ 하루는 고하 송진우 선생(독립운동가)이 아버지를 승용차에 태우고는 돈암장의 이승만 박사에게 데려갔다고 한다. 해방 후 이 박사가 귀국한지 며칠 안 됐을 때였다. 송진우는 "이 사람이 식견도 많고 똑똑하니 써보라"고 하면서 아버지를 천거했다. 아버지와 이 대통령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 아버지는 언제까지 공직 생활을 했나.
▲ 1955년쯤에 공직을 그만뒀다. 아버지는 이 대통령을 모시면서 친일파를 기용하면 안 된다고 여러 차례 건의했다고 한다. 친일파 세력은 이기붕(비서실장·부통령 역임)과 프란체스카 여사를 통해 사람을 천거하려 했다. 아버지는 주요 인사와 관련해 대통령을 만나려고 하다 차단당하기도 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닥터 리(이승만)가 지금 쉬고 있어서 못만난다"면서 집무실 앞에서 아버지를 막기도 했다. 아버지는 이 대통령이 점심으로 먹는 우동 냄비 아래에 쪽지를 깔아서 들여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 본인은 이승만 대통령 취임 후 경무대 안에 살았나.
▲ 정부 수립 후에 우리 집은 원남동에 있었다. 당시에는 통신이 안 좋은 상태였다. 이 대통령은 연락하기 어려우니 아버지에게 경무대 안에 들어와 살라고 했다. 이 대통령 내외는 경무대 본관에, 우리는 그 밑의 집에 살았다. 오후에는 이 대통령 내외가 해피라는 애완견과 함께 산책하다 우리 집 앞을 지나가곤 했는데, 나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안부를 묻곤 했다. 어머니가 음식을 만들어 대통령에게 보내기도 했는데. 이 대통령은 "어머니한테 음식 잘 먹었다고 전하라"고 말하곤 했다.
-- 이 대통령 내외와 함께 영화도 봤다고 하던데.
▲ 토요일에 이 대통령 내외는 응접실에서 16밀리 영화를 보곤 했다. 이 대통령이 산책길에 나를 보고는 영화를 함께 관람하자고 했다. 나는 이 대통령 내외 뒤에 앉아서 영화를 봤다. 공보처 직원들이 영사기를 갖고 경무대에 들어오면 영화 보는 날이었다. 어머니는 이 대통령의 초청에도 절대 가지 않았으니 나 혼자 본관에 올라가서 이 대통령 내외와 영화를 보곤 했다.
-- 이 대통령한테 음식도 얻어먹었나.
▲ 하루는 마당에서 놀고 있던 나를 이 대통령이 본관으로 데려간 적이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냉장고를 봤고, 그 안에 있던 파인애플을 얻어먹었다. 처음으로 먹어본 그 과일은 아주 맛이 좋았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 학창 시절은 어떠했나.
▲ 논산에서 살던 나는 서울로 이사 와서 혜화초등학교를 다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쯤에 청운초등학교로 전학했다. 우리 집이 경무대로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이후 6.25 전쟁을 맞아 부산 용두산 꼭대기에 있던 광복피난초등학교에 다니다 당시 부산으로 내려온 경기중학교에 입학했다. 서울이 수복돼서 서울로 올라온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 학창 시절 건강이 안 좋았나.
▲ 경기고에 입학했는데, 1학년 때 가슴막염(늑막염)으로 신장까지 나빠졌다. 당시에는 양약을 구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한약과 민간요법을 모두 써봤지만 효과가 없었다. 나는 휴학을 거쳐 자퇴한 뒤 충남의 광천상고로 옮겼으나 수업에 참여하기 어려웠다. 나는 쉬면서 카뮈, 사르트르 같은 책들을 보기도 했는데, 부모님은 나의 건강을 걱정해서 책을 치우기도 하셨다.
-- 대학교는 어떻게 가게 됐나.
▲ 나의 학력 단절을 걱정하신 아버지의 권유로 대학교에 진학했다. 단국대 정치학과에 입학했는데, 여전히 가슴막염으로 수업에 제대로 참여할 수 없었다. 3학년 때는 학교에 나갔는데, 수업을 따라가기가 어렵지는 않았다.
-- 4·19 혁명 당시 시위에 참여했나.
▲ 대학교 2학년 때에 바로 위 누님이 고려대 정외과에 다녔다. 누님은 성격이 괄괄하고 남자친구도 많았다. 4.19 당시에 누님 친구인 고려대 학생들이 우리 집에 와서 시위 계획을 세웠는데, 나도 그 논의에 참여했다. 나는 학생들에게 제공할 머리띠에 학교 이름을 새기는 일도 했고, 고려대와 연세대 학생들에게 시위에 나서도록 연락하는 일을 하기도 했다. 당시에 연세대와 고려대는 라이벌 의식이 있었기에 서로 먼저 시위에 나서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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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대는 어떻게 가게 됐나.
▲ 5·16쿠데타 다음 해에 병무청에 근무 중인 동네 친구 형님한테 부탁해서 군대에 가게 됐다. 당시에는 병역을 기피했던 사람들이 직장에서 쫓겨난 뒤에 무더기로 입대하는 상황이어서 군대에 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입대 5일 전에 군대에 간다고 부모님께 이야기했더니 난리가 났다. 어머니는 우셨고, 아버지는 역정을 내셨다. 나의 몸이 군대에 갈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고 생각하신 것이었다. 나는 내 건강이 어느 정도인지 체크하기 위해 군대에 가는 것이라고 설득했다. 이대로 있으면 나는 룸펜(한량 또는 건달)이 될 것이라고 했다. 훈련을 못 견디면 군 병원을 거쳐 집으로 돌아올 것이고, 잘 견디면 건강이 회복된 것이니 뭐든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설득했다. 입대 후 논산훈련소에서 '모범중대'에 배치돼 혹독한 훈련과 기합을 받았다. 나는 한 번도 낙오된 적이 없었고, 건강에 자신감이 생겼다.
-- 5·16쿠데타에 대한 당시 사회 반응은 어떠했나.
▲ 4·19 혁명 이후 민주당이 집권했으나 신파와 구파가 엄청나게 싸웠다. 도가 지나쳐서 국민들이 손가락질했다. 이는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는 명분이 됐다. 당시 장준하 선생이 주도하는 사상계라는 잡지마저 쿠데타를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 5·16쿠데타가 없었다면 한국의 산업화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 그런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장면 정부 때도 산업화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군사정부가 아니었다면 자원을 효율적으로 투입하기 어려웠을 수도 있다. 박정희가 10월 유신만 하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훨씬 좋은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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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 졸업 후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나.
▲ 동아일보 입사 시험에 합격했다. 경쟁률이 60대 1이었다. 나는 신동아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1년 후 동아일보 편집국으로 되돌아오는 것이 관례인데, 나는 3년이나 있었다. 신동아로 갈 때 3년간 있으면 동아일보 편집국의 원하는 부서에 보내준다는 조건이 있었다. 3년 후에 윗사람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동아일보 사회부에서 경찰서를 출입하라고 하는데, 내 동기들이 이미 거쳐 간 곳에서 일을 할 수는 없었다. 나는 경향신문으로 옮겼다.
-- 경향신문에서 정착은 쉬웠나.
▲ 경향신문 정치부로 옮긴 직후에 내근하고 있었는데, 부장이 원고 뭉치를 던져주면서 한번 읽어 보라고 했다. 청와대에 출입하는 정치부 수석기자가 60년대 정치를 정리한 기사였다. 그 원고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부장은 나한테 다음 날 아침까지 써오라고 주문했다. 나는 평소에 스크랩해놨던 자료들을 토대로 기사를 작성했다. 그 기사가 경향신문 1면에 실렸다. 경향신문 정치부 기자들이 항의하자 부장은 수석기자가 쓴 원고를 그들에게 보여줬다. 그들은 더 이상 항의할 수가 없었다.
-- 기자는 왜 그만뒀나.
▲ 10월 유신으로 국회가 해산되니 정치부 기자들이 할 일이 없었다. 취재원을 만나기도 어렵고, 기사를 써도 나가지 않았다. 그때 언론계 선배였던 김성진 문화공보부 장관이 대사관 공보관으로 일할 생각이 있는지 물었다. 외국 생활을 한다고 하니 아내도 반색해서 공직을 시작하게 됐다. 주일대사관에서 2년, 주싱가포르대사관에서 3년여 정도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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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 공보비서관을 했는데, 어떤 업무를 했나.
▲ 대통령의 경제 연설문 작성을 했고, 부인인 이순자 여사의 일정을 담당하는 일을 맡았다. 나는 이 여사 공식 행사의 20% 정도만 언론에 보도되도록 했다. 이 여사는 섭섭한 눈치라고 부속실 비서로부터 전해 들었지만 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 전 대통령은 어떤 사람이었나.
▲ 직선적이며 행동파였고, 뒤끝이 없었다. 술을 마시면 '나실 때 괴로움'으로 시작되는 어머니 노래를 불렀다. 어릴 때 집안이 가난했다. 9살 아래인 동생 전경환을 업고 남의 집 밭일을 나간 어머니를 밤늦게 동네 어귀에서 기다리곤 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배추 뿌리를 얻어와서 칼로 자른 뒤 먹을 것으로 줬다고 한다. 전 대통령은 그런 이야기를 하면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전 대통령이 동생 전경환에게 가진 애정은 아버지가 아들을 대하는 듯한 심정이었던 것 같다.
-- 이순자 여사도 전경환에 대해 같은 생각이었나.
▲ 이 여사도 전경환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 화를 냈다. 이 여사한테 전경환 문제에 관해 이야기했더니 "우리 삼촌(전경환)이 대통령 동생으로 편하게 술이나 마시고 지낼 수 있지만 사회에 기여하겠다는 뜻으로 잠바때기 걸치고 3등 기차를 타고 전국을 다니면서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고생하는데, 대통령 동생이라고 해서 욕하는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이라고 했다.
[본인 제공]
-- 김영삼 대통령의 공보수석 시절은 어떠했나.
▲ 김 대통령은 대변인(공보수석)이 많은 것을 알아야 한다면서 북한 정세 등 여러 정보를 말해줬다. 그는 내 업무가 아닌 사안에 대해서도 의견을 물었다. 인사에 대해서도 의견을 말하라고 했다. 후보들 이름을 거론하면서 누가 장관으로 적합한지 토론하기도 했다.
-- 김 대통령한테 신임받았나.
▲ 대통령과 나눈 이야기는 철저하게 비밀로 한다는 것이 나의 원칙이었다. 국가의 중요 기밀은 60%가 부인으로부터, 40%가 승용차 운전사로부터 유출된다. 내가 대통령과 나눈 이야기를 외부에 함부로 흘리지 않는 것을 대통령이 알고 여러 사안에 대해 상의한 것으로 본다.
-- 공보수석에는 어떻게 발탁됐나.
▲ 김영삼-김일성 정상회담을 위한 남북정상회담 예비 접촉이 판문점에서 열렸다. 남한의 수석대표는 당시 이홍구 통일원 장관이었다. 안기부 3특보였던 나도 대표로 참여하게 됐다. 김 대통령이 CCTV로 회담하는 장면을 봤는데. 내가 북측을 거세게 공격하는 것에 대해 긍정적 평가를 했다고 한다. 그때 김 대통령은 "진흙 속에서 진주를 건졌다"고 표현했다고 한다. 그것이 계기가 돼서 청와대 공보수석이 됐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 김영삼 대통령은 어떤 사람이었나.
▲ 경청하는 스타일이었다. 본인의 뜻에 반대하는 이야기를 해도 불쾌한 안색을 하거나 말을 끊지 않았다. 그는 어휘력이 없어서 욕을 할 줄도 몰랐다. 욕을 한다는 것은 '한심한 놈'이라는 표현이었다. 아주 심한 욕은 한을 길게 빼서 '한∼심한 놈'이라고 하는 정도다. 일각에서는 그가 머리가 나쁘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직관력이 발달했고 사안에 관해 설명하면 빨리 이해했다. 다만 정보를 글이 아닌 청각을 통해 입수하는 사람이었다. 신문의 가십도 비서관이 읽어줄 정도였다.
-- 민자당 대표 당시 김영삼이 현직 대통령인 노태우에게 폭언한 적이 있다고 하던데.
▲ 어느 날 저녁 무렵에 김 대표가 청와대의 노 대통령을 찾아왔는데, 고성이 오갔다고 한다. 김 총재는 안기부가 자신을 모략한다고 해서 화가 난 것인데, "내 손에 죽고 싶으냐"는 김 총재의 발언이 문밖에서 들렸다고 한다. 당시 이 말에 분노한 대통령 비서관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면서 나에게 전해준 이야기다. 김영삼 대통령은 성격이 강해서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를 돕게 된 계기가 있나.
▲ 나는 공직을 그만두고 공부하고 싶었다. 환경부 장관 시절이었는데,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총재로부터 보자는 연락이 왔다.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가 김대중에 패배한 직후였다. 그는 다시 대선에 도전하려 하니 도와달라고 했다. 나는 완곡하게 거절하고는 공직 후 미국에 공부하러 갔는데, 어머니가 편찮다는 연락이 와서 일시적으로 귀국했다. 그때 아이들이 이회창 변호사 사무실에서 여러 번 연락이 왔었다고 했다. 이 총재를 찾아갔더니 나를 보자마자 언성을 높였다. 그만큼 진지하게 이야기했으면 알아먹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학교(경기고) 선배인 데다 고향도 같은 충남이어서 같이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다. 그는 다시 목소리를 낮춰서 좀 도와달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잠시 다른 사람을 구할 때까지만 도와주기로 했는데, 세풍사건이 터지면서 발을 빼지 못했다.
-- 이회창은 어떤 사람인가.
▲ 두뇌가 명석했다. 판단이 빠르고 논리적이며 기억력도 좋았다. 그러나 좀 쌀쌀한 스타일이었다. 성격에 여백이 없다는 것을 나는 금방 느꼈다. 정치할 스타일이 아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 내년 총선은 어떻게 될까.
▲ 민주당이 달라질 것으로 본다. 이재명 대표가 아무리 늦어도 연말쯤에는 대표직을 그만둘 것이다. 선거를 망치면 자신의 정치생명도 끝이어서 계속 무작정 이대로 갈 수는 없을 것이다. 이 대표가 물러나면 민주당은 비상대책위를 구성해서 면모를 확 바꿀 수 있다. 민주당은 그런 것을 잘한다. 국민의 힘은 공천을 잘해야 한다. 유권자들이 실망하면 고개를 돌릴 것이다. 벌써 시중에는 검사 출신 10∼20명이 공천 대비를 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닌 악의적 소문일 수도 있다. 만약에 그런 것이 현실화하면 인심이 떠날 것이다. 국민의 힘이 내년 총선에서 표를 얻지 못하면 윤 대통령은 아무것도 못 한다. 급격한 레임덕에 빠지기 때문이다.
-- 이재명 대표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나.
▲ 유능한 사람이다. 그러니 성남시장, 경기도지사를 거쳐 대통령 후보가 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유능은 도덕성의 바탕 위에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유능한 것이 역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 586 정치인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 그들의 역할은 끝났다고 본다. 그들이 민주화운동에 기여한 것은 누구나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이 정치활동에서 국민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들이 민주화 투쟁을 열심히 했을지는 몰라도 국가를 운영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조국 사태 등을 계기로 그들에 대한 국민 인식이 달라졌다. 그들이 다시 신뢰를 얻기는 어려울 것으로 본다.
-- 각 당은 내년 총선에 대비해 어떻게 해야 하나.
▲ 젊은 사람들을 충원해야 한다. 기존 정치인 중심으로 선거하면 쉽지 않을 것이다. 현실정치에 관심 있는 젊은 정치인이 얼마나 있는지는 모르겠다. 기성 정치인을 답습하는 젊은이도 있다.
[촬영 이건희]
-- 취미는 무엇인가.
▲ 시간이 되면 서예를 한다. 어렸을 때 할아버지로부터 배웠다. 경상북도 경주와 포항 근처에 파평윤씨 시조 할아버지의 산소가 있다. 왕릉처럼 큰 산소다. 종친회가 그곳에 작은 건물을 지어 충효관이라고 했다. 그 현판에 '충효관'이라는 글씨는 내가 쓴 것이다.
-- 술은 잘 마시나.
▲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술을 전혀 못 먹는다. 나도 마찬가지인데, 기자 시절 선배들로부터 "기자가 술도 못 마시냐?'는 핀잔을 들어서 술을 조금씩 마시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술을 잘 못 마신다. 한때는 식사하면서 와인을 한 잔씩 마시기도 했다.
-- 책은 많이 읽는가.
▲ 아버지가 평생 책에서 손을 놓지 않으셨다. 나도 기자 시절 늘 책을 들고 다녔다. 영어로 된 정치학책이었다. 야당을 출입할 때 기자실에서는 화투판이 벌어지곤 했다. 야당이 회의하면 파벌이 많아서 결과가 나오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기 때문이다. 나는 화투에 참여하지 않고 구석에 앉아 책을 봤다. 김영삼 정부 시절에 청와대 공보 비서관을 할 때는 언어를 구사하는 능력을 기르기 위해 시집을 많이 읽었다. 논리력이 약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문학평론을 읽을 때도 있었다. 요즘에는 새로운 트렌드를 알려주는 책을 주로 읽는 편이다.
[촬영 이건희]
-- 본인의 장단점은 무엇인가.
▲ 기자를 하면서 하고 싶은 말을 간결하게 하는 훈련을 받았고 분석력도 길렀다. 다행히 나는 책을 많이 읽는 편에 속했기에 논리력, 사고력, 교양이 길러졌다고 본다. 성격이 급한 것은 단점이다. 아버지는 내가 성격이 급해 과격해지기 쉬우니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면 무조건 한순간을 참으라고 하셨다.
-- 하루 루틴은 어떻게 되나.
▲ 오후 9시30분∼10시에 잠자리에 들어서 오전 5시쯤에 일어난다. 기상 후에는 뉴스를 점검하고 칼럼이나 사설도 본다. 그다음에 아침 운동을 하고 오전에 책을 본다.
-- 좌우명이나 삶의 원칙은.
▲ 거창한 것은 없다. 그냥 그때그때 최선을 다한다. 또 양심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자 한다. 일 자체뿐 아니라 그 방법도 부끄러우면 안 된다. 항상 원칙을 갖고 정도로 가자는 생각이다. 힘들어도 항상 그렇게 일을 했다. 나중에 보면 그렇게 하는 것이 결과에서도 좋았다.
(취재지원 이건희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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