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쉬타인은, 이탈리아 수학자로 현대적 미분기하학에 권위가
있는 레비 치비타(Levi Civita)를 존경하여, 교우관계를 깊이하여
프린스톤의 고등학술연구소에 초빙하여 1년간 공동연구를 하였다
레오폴드 인펠트는 자서전에서,
레비 치비타와 아인쉬타인이, 중력파(重力波)에 대하여 토론하고
있을 때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침착하고 조용한것이 특징인 아인쉬타인과, 몸집이 작고 바짝 마른
그리고 과장된 몸짓을 하는 레비 치비타가,
칠판에 공식을 쓰고, 영어로 보이는 언어로 대화를 나누었다>
<아인쉬타인은, 몇초간격으로, 흘러내리는 넓은 듯한 바지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아인쉬타인이 수학에 대한 생각이 바뀐 것은,
민코프스키와 힐버트(D. Hilbert)가 가르치고 있던 괴팅겐대학에서,
물리학의 연구에 있어서 수학적 환경이 너무나도 풍요로웠기 때문이라는
생각에서 유래한 듯하다
(다비트 힐버트 : 20세기 최대의 수학자중에 한 명입니다
양자역학에 밑바탕이 되는 수학을 제공한 힐버트공간의
창시자입니다
또한 그는 아인쉬타인과 일반상대성이론을 동시에 수립
하였지만 아인쉬타인에게 그 공적을 양보했습니다)
보다 젊은 세대는 괴팅겐대학에서 변화된 모습을 얻게 되었다
그들 가운데는, 훗날에 아인쉬타인이 연구하는 프린스톤에서
동료가 되는 헤르만 바일(H. Weyl 1885~1955)도 포함된다
바일은, 일반상대론의 수학적 해설서 <시간 공간 물질>을
1918년에 출판하였는데, 이 책은 판을 거듭하며 읽혀졌다
아인쉬타인은, 루드비히 프란틀(L. Prandtl 1875~1953)에
의해서 꽃피운 공업적 수학에 있어서 괴팅겐대학의 전통으로부터
먼 거리에 떨어져 있었을 뿐이다
(루드비히 프란틀 : 20세기 최대의 유체 및 항공역학의 이론가
그의 헝가리인 제자 폰 카르만이 "프란틀은 유체역학에 있어서
20세기의 오일러이다"라고 말 할만큼 뛰어난 공학자입니다
위의 사진은 물의 흐름을 실험하는 것 같습니다)
1920년 이후로, 아인쉬타인은 조수(助手)를 고용했지만, 그들 모두는
수학적으로 뛰어났다 그들의 연역적(演繹的) 재능, 펜(pen)의 원활한
미끄러움(*아마도 계산을 잘 했다는 말인듯합니다)을 높이 샀다
그는, 레오폴드 인펠트와 볼프강 파울리(W. Pauli)와 같은 이론물리학자,
천문학자인 빌헬름 지터(W de Sitter 1872~1934)와 협력관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같이 공동으로 글을 많이 쓴 것은 수학자이다
텐서계산을 사용한 아인쉬타인의 초기논문은 2부로 만들어서 준비했는데,
그 제1부의 물리학에 관해서는 아인쉬타인이 쓰고, 제2부의 수학부분은
취리히의 동료였던 마르셀 그로스만이 쓰고, 텐서해석(解析)에 대하여
해설한다는 방식이었다
아인쉬타인은, 깊은 과학적 문제에 대하여 토론하면서 산책한다는
독일적 전통을 좋아하였다
그의 프린스톤연구소의 산책의 동반자중에 한 사람이,
수학자 쿠르트 괴델(K. Goedel)이었다
-번역의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