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을 사랑하는 리만의 정열이 카나리아새의
노래하는 목소리가 되어,
슈테른의 귀에 아름답게 울려퍼진 것이었다
괴팅겐대학에서 1년간 머물었던 리만은,
1847년, 베를린으로 옮겨서,
베를린대학에서 2년을 보냈다
베를린대학에는 야코비(Jacobi), 디리클레(Dirichlet),
슈타이너(Steiner), 거기에다가 아이젠쉬타인(Eisenstein)
이 있었다
리만은 디리클레의 수론, 정적분, 편미분방정식의 강의,
야코비의 해석역학과 고등대수의 강의, 아이젠쉬타인의
타원함수론의 강의를 청강하였다
함수이론에 복소량(複素量)을 도입하는 것을 둘러싸고
아이젠쉬타인과 서로 논의하였지만,
의견이 서로 맞지않아서,
두 사람의 생각방식은 전혀 서로 용납할 수 없게 되었다고,
나중에 데데킨트(Dedekind)가 말했다
데데킨트에 의하면,
리만은 "아이젠쉬타인은 식의 계산을 기초로 한다는 입장에
머물렀다"고 증언하고 있지만,
"코시-리만의 미분방정식"을 통해서 복소수함수의 해석성을
규정하고자 한 것은 리만의 입장이기 때문에,
확실히 아이젠쉬타인과는 완전히 차이가 있다
친한 교류가 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타원함수론에 있어서 복소변수를 사용한다는
관점은 서로 공유하고 있었다
아이젠쉬타인은 괴팅겐의 슈테른에게 보낸 편지에서
리만을 언급하며, 리만에게 매우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전하며, 그 자신이 스스로 리만을 피하고 있는 점을
유감으로 생각한다고 털어놓았다
1849년, 리만은 괴팅겐으로 되돌아 왔다
과학이나 철학의 강의에 출석하고,
빌헬름 베버(W. Weber)의 실험물리학의 강의에
큰 감명을 받아서,
베버, 울리히, 슈테른, 리스팅( Listing)의
수학물리의 세미나에 가입하고,
물리의 실험연습에 참가하였다
요한 칼 프리드리히 가우스(Johann Carl Friedrich Gauss, 1777 ~ 1855)
가우스는 오일러와 더불어 수학사에서 가장 뛰어난 수학자입니다
리만이 '미분기하학'을 설명했을 때에 다른 사람은 모두 몰랐는데
가우스만은 그것을 이미 이해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독일의 수학자가 물리학등 응용수학을 연구한다는 전통은
여기에서 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생물물리학에 관심이 많습니다^^
1851년 11월, 학위취득을 위한 논문
<1개의 복소변화량의 함수에 대한 일반적 이론의 기초>를
대학에 제출하였다
시험은 12월 3일에 있었고,
공개토론과 학위수여는 12월 16일에 있었다
심사를 본 사람은 가우스(C. F. Gauss)였다
리만은 실수변화량의 함수개념의 형성사(形成史)에 대한
회상에서 이야기를 시작하여, 계속하여
복소수변화량의 함수에 대한 고찰로 넘어갔다
복소수변화량 z이 취할 수 있는 값의 각각에 대하여
또 하나의 복소수변화량 w의 값을 대응시킬 때에,
일반적으로 미분상(微分商)인 dw/dz의 값은
미분 dz에 의존하지만,
리만은 "dw/dz의 값은 dz에 의존하지 않고서 결정된다"고
하는 성질을 밝혀내어서
"z의 함수 w"의 개념을 정의하였다
이것은 "w가 z에 대하여 코시-리만의 방정식을 만족한다"는
것이랑 동등하다
-번역의 계속-
August Louis Cauchy(코시)와 Bernhart Riemann(리만)
프랑스와 독일의 수학자
인류의 명예를 위하여 수학을 연구한 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