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초강목』
① 이시진(李時珍)의 생애와 그의 편저 『본초강목(本草綱目)』의 성립 (사진 – 이시진의 초상화)
이시진의 본초강목은 그 풍부한 내용과 광범위한 기술(記述)로 후세에게도 절대적 영향력을 가지고, 중국 의약학 역사에서 거대한 책으로 특히 이름이 높다.
이시진(1518년~1593년)은 자(字)가 동벽(東璧)이라고 하며, 만년에는 호(號)가 빈호산인(瀕湖山人)이다. 기주(蘄州, 오늘날 호북성 기춘현)의 사람이다. 할아버지는 영의(鈴醫)(*1)로서 활약했고, 아버지 이언문(李言聞, 호號가 월지月池)은 그 지방의 명의였다. 이시진은 유년기부터 몸이 약했고, 그 때문에 소년기부터 의학서적을 읽어보기 시작했고, 아버지의 진찰을 멀리서 바라보고, 게다가 아버지가 글로 쓸 때 처방을 도와주었다. 하지만 당시 의사의 사회적 지위가 높지 않아서, 아버지 이언문은 이시진이 의업(醫業)을 잇는 것을 바라지 않고, 과거(科擧)의 길로 나아가기를 강하게 희망했다. 이시진은 14살에 과거시험자격이 있는 수재(秀才)에 합격하여, 3번째 향시 시험을 치러려고 무창(武昌)에 갔지만 합격에 이르지 못했다.
23살이 되어서 그는 과거시험을 포기하고 아버지처럼 의학을 배울 결심을 굳히고, 각고연찬(刻苦硏鑽)하고, 의학의 이치를 연구하여, 그는 그 후 수년 만에 그 지방의 명의(名醫)로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 사이 초왕부(楚王府)의 어린아이가 앓는 충벽(虫癖)을 멋지게 치유하여 의사로서 명성을 더욱더 높였다. 이윽고 초왕부는 그를 봉사정(奉祠正)으로 부르며, 양의소(良醫所)의 직무도 맡게 했다. 게다가 그는 북경(北京)에 있는 태의원의 원판(院判)에 뽑혔다. 하지만 그는 이런 지위와 직무에 기뻐하지 않고, 1년쯤 지나서 병을 핑계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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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30일
토요일 맑음
SS도서관에서 번역하다
이시진은 의업(醫業)을 실천하면서, 그때까지 나온 본초학 서적에서 수많은 착오와 중복 혹은 실수(遺漏 유루) 등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어긋나고 틀리거나 또는 잘못이나 실수를 정확히 셀 수조차 없는」 상황에서, 사람들의 건강과 생명을 지킬 수 없다고 걱정하여, 새로운 본초학 서적을 편집하기로 결심했다. 이때가 이시진이 34세였다.
그는 「군서(群書, 여러 가지 많은 책)을 찾아 다녔다. 수많은 사람에게 책을 수집하도록 했다. 무릇 자사경전(子史經傳, 여러 많은 학자의 책과 사서경서史書經書), 성운농포(聲韻農圃, 시골 지방의 노래), 의복성상(醫卜星相, 의사와 점치는 사람, 사주와 관상을 보는 사람, 점성술사의 무리), 악부(樂府, 가곡歌曲을 담당하는 관청) 제가(諸家)에서 얼마 되지 않더라도 얻을 수 있다면, 그때마다 말을 자주 메모하여」 기록했다. 그는 옛 사람의 경험과 성과를 적극적으로 정리하고 흡수할뿐만 아니라, 실제로 약초를 재배하는 농민이나 시골의 고노(古老, 옛일을 아는 노인), 나무꾼과 사냥꾼 그리고 어부와 같이 일하는 백성에게도 가르침을 부탁하고, 스스로 심산황야(深山荒野)에 들어가 각종 식물, 동물 그리고 광물의 표본을 조사하고 수집하려고 노력했다.
게다가 그는 박하(薄荷), 홍화(紅花), 기애(蘄艾) 등을 직접 자기 손으로 재배하고, 만타라(曼陀羅)와 하수오(何首烏) 등은 자신의 입으로 실험삼아 복용해서 정확히 알 수 있도록 노력을 계속했다. 참고문헌 800여종, 27년의 노고(勞苦)를 거쳐서, 당신미(唐愼微)의 『경사증류비급본초(經史証類備急本草)』를 기초로 하여, 무수히 정리하고 보충하고, 자신의 발견과 새로운 견해를 더하고, 3번에 걸쳐서 큰 개정(改訂,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는 일)을 한 뒤에 만력(萬曆) 6년 (1578년)에 이시진이 60살이 되는 해, 끝내 거대한 책 『본초강목(本草綱目)』이 완성을 보게되었다.
② 『본초강목』의 의의 (사진 – 본초강목의 머리말)
『본초강목』은 모두 52권에 걸쳐서 중국 고대 과학의 보고(寶庫) 중에서도 눈에 띄게 찬란하게 빛나는 명저이다. 이 책의 주요한 업적을 아래와 같이 정리해보자.
(1) 16세기 이전의 중국 약물학(본초학)을 종합하여 정리했다. 『본초강목』은 1800 여종에 달하는 광범위한 약물을 수록했다. 하지만 이 숫자는 『증유본초(証類本草)』가 싣고 있는 1500 여종에 비해서, 300 여종 증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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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책 속에 약물을 묘사한 그림은 1000여폭에 달하고, 방제(方劑)도 1100 여개가 있다. 이 책은 무엇보다 16세기 이전의 중국 약물학을 집대성한 책으로, 약학(藥學)의 역사에 있어 중요한 기념비적 서적이라고 할 수 있다.
(2) 그때까지 본초 서적에 있었던 몇 가지 잘못을 수정했다. 예를 들면 실제로 서로 다른 약(藥)인데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같은 것으로 취급해온 위유(葳蕤, 별명이 옥죽玉竹)와 여위(女萎)을 분명히 구분하고, 같은 것인데도 불구하고 잘못해서 2개의 약물로 착각하는 남성(南星)과 호장(虎掌)을 같은 약으로 결론을 내렸다. 또한 잘못해서 난초(蘭草)로 간주했던 난화(蘭花), 잘못해서 백합(百合)으로 여겼던 권단구(卷丹區)를 구별하고, 잘못으로 초류(草類)에 속했던 생강과 서여(薯蕷, 마 또는 산약)를 채소류에 넣었다.
(3) 당시 가장 발달한 약물 분류법을 제안했다. 요컨대 이시진의 약물 분류법에는 특별히 우수한 점이 2가지 있다. 첫 번째는 「미(微)에서 거(巨)에 도달한다」, 「천(賤)에서 귀(貴)에 도달한다」는 원칙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이런 사고방식은 무기(無機)에서 유기(有機)로, 하등(下等)에서 고등(高等)으로 나아간다는 당시의 진화론의 관점에 부합(符合)한다.
2번째는 「물(物)은 류(類)로 따르고, 목(目)을 강(綱)에 따라서 분류한다 (약물(藥物)을 그 유(類)마다 분류하고, 「목(目)」은 「강(綱)」이라는 큰 분류를 토대로 하여 배분한다」는 분류법으로, 이것은 각종 약물을 그 성질에 따라 분류하는 방법이지만, 찾거나 조사하는 데에 편리하다.
이시진이 책의 이름을 「강목(綱目)」이라는 두 글자를 사용한 이유는 송나라 시대의 주희(朱熹) 의 『통감강목(通鑑綱目)』, 명나라 시대의 누영(樓英, 1320년~1389년)가 쓴 『의학강목(醫學綱目)』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본초강목』의 내용을 생각하면, 이 『강목(綱目)』의 두 글자에는 더욱이 특별한 이유가 들어있다고 미루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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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유 중에 첫번째는 「16부(部)를 강(綱)으로 하고, 60류(類)를 목(目)으로 하여, 각각은 종류에 따라서 모으게 한」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표명(標名, 표제로 한 약물의 명칭)을 강(綱)으로 하고, 사물(의 형편)을 늘어놓은 것을 목(目)으로 한다」는 것은 각 약물마다 표제로서 약명을 싣는다는 것은 바로 대강(大綱)이고, 기미(氣味, 약물의 성질과 맛), 주치(主治)를 굵은 글자로 나타낸 것은 소강(小綱)이다. 석명(釋名, 약물의 명칭과 이명異名에 대한 해석), 집해(集解, 약물의 형상, 채집, 산지, 품질에 대한 해설 및 모아서 기록한 부분), 발명(發明, 용법에 관한 각 의사들의 이론을 모아서 기록한 부분)으로 나누어서 주해(注解)한 것이 바로 목(目)이다. 이유의 세 번째는 같은 약물의 다른 부분이 각각 약으로 사용될 때에 그 약물의 전체를 강(綱)으로 하고, 각 부분을 목(目)으로 한다. 예를 들어 「표제의 용(龍)을 강으로 하면, 치(齒), 각(角), 골(骨), 뇌(腦), 태(胎)가 목으로 나타난다. 표제의 양(粱)을 강으로 하면, 붉은 또는 노란 양미(粱米)는 전부 목의 류에 배치된다」. 이 같은 본초강목의 분류법은 거의 모든 것이 정확하게 「강(綱)」과 「목(目)」으로 정리되어 있다.
(4) 각종 약물의 지식을 체계적으로 기술하였다. 『본초강목』에 나오는 각종 약물에 대해서는 교정(校正, 다른 본초학 서적에 별명別名으로 수록된 약물의 나타낸 것), 석명(釋名), 집해(集解), 변의(辨疑), 정오(正誤, 틀린 말을 바로잡다), 수치(修治, 가공방법), 기미(氣味), 주치(主治), 부록(附錄), 부방(附方, 응용한 방제) 등의 항목이 있다. 그리고 약물의 명칭, 역사, 감별에서 채집, 가공, 효능, 방제 등에 이르기까지 그 설명은 자세하기가 이를 때가 없다. 그 중에서도 발명의 항목에서, 주로 이시진이 약물을 관찰하고 연구하고 또한 실제로 응용하여 새로운 발견과 경험이 기술되어 있어서, 본초학 지식을 한층더 풍부하게 해주었다. 예를 들어, 삼칠(三七)의 효능을 이시진은 「지혈(止血), 산혈(散血), 정통(定痛)」으로 정리했지만, 이것은 임상면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것에 부합(符合)하는 탁월한 식견이다. 또한 연호색(延胡索)의 지혈(止血), 대풍자(大風子)의 마풍(麻風)을 치료하는 효능에 대해서도, 이시진은 거의 긍정했다.
(5) 몇가지 비과학적인 견해를 바로잡았다. 이시진은 과학적 태도로, 그때까지 수은(水銀)과 웅황(雄黃)을 복용하여 신선(神仙)이 된다는 식의 전해오는 말을 엄하게 비판했다.
(6) 세계의 박물학(博物學) 영역을 넓히고 풍부하게 하였다. 『본초강목』은 약물학에 대한 상세한 기술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인체생리, 병리, 질병증상, 위생예방 등에 관해서도 정확히 서술했다. 또한 대량의 과학적 자료를 종합하여 식물학, 동물학, 광물학, 물리학, 화학, 농학, 천문학, 기상학 등 많은 분야에서도 광범위한 논술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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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대량의 고대 문헌을 수록하고 보존했다. 『본초강목』은 16세기 이전의 문헌자료를 대량으로 인용하고 싣고 있다. 그중에는 의약문헌, 즉 역대 여러 의사들의 본초학 책이나 의약 전문서는 물론이고, 의학분야 이외에 경사백가(經史百家)의 저술을 포함하고 있다. 이와 같이 수많은 게재문헌(揭載文獻) 중에는 원서(原書)가 나중에 사라지고 흩어진 것도 있고, 그러한 문헌은 이 『본초강목』에서 인용하여 원서의 명확한 주기(注記)에 의해서, 부분자료가 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그것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③ 『본초강목』의 영향
『본초강목』의 내용은 엄청나게 풍부하고, 게다가 분량이 많다. 따라서 그 출판은 만력(萬曆) 21년(1593년)에 호승룡(胡承龍)이 자금을 내어서 남경(南京)에서 인쇄한 제1판 (금능판金陵版)이 간행되었다. 그 후에 10년이 지나서 만력 31년 (1603년)에는 강서(江西) 순무(巡撫)인 하량심(夏良心)이 남창(南昌)에서 제2판이 원본과 같이 조각해서 간행됐다. 그 뒤에도 때때로 재판(再版)을 반복했다. 그리고 이 책이 그 후세에 준 영향은 실로 대단히 크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이 책은 일찍부터 조선, 일본 등의 나라에 널리 전하여 퍼지고, 일본어 이외에 조선어, 라틴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의 외국어로 전부 그렇지 않으면 초역(抄譯, 부분만 뽑아서 번역하다)되어서, 세계 학자의 주목을 받았다.
영국의 박물학자이며, 진화론을 주장한 다원(Ch Darwin, 1809년~1882년)도 그의 『종의 기원』(1859년), 『동물과 식물의 사육과 재배 하의 변이』 (1868년), 『인류의 기원 내지 성의 선택』 (1871년) 등 3권의 책에서 여러 번 걸쳐서 『본초강목』에 실린 내용을 인용했다. 이 때에 다윈은 그런 자료를 『본초강목』에서 인용했다고 하지 않고, 『고대중국백과사전』에서 뽑아서 이야기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고대중국백과사전』말로 다름아닌 『본초강목』이었다.
다만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은 시대적 제약(制約) 때문에 『본초강목』에도 틀린 내용이 없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 책 속에 「썩은 재(爛灰 난회)로부터 파리가 생긴다」, 또는「썩은 풀에서 반딧불이 생긴다」, 임신부가 토끼고기를 먹으면 아기의 입이 토끼의 입이 된다 등 미신(迷信)과 같은 것을 믿고 있다. 그리고 「오래된 거울은 오래된 칼과 같다. 신명(神明)과 같다. 그러므로 사매오악(邪魅忤惡, 악령이나 사악한 기)을 미리 막아준다」 등 근거없는 설에 찬동(贊同)하고 있다. 이 밖에도 『본초강목』이 인용한 역대문헌(歷代文獻)은 그 출전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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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주기(注記, 주를 달다)에 오류가 있고, 출전명(出典名)도 그 내용과 어긋나는 경우도 일부있다. 그럼에도 여기에서 『본초강목』의 가치가 흔들 리가 만무하다. 후세의 의학자와 그 밖의 학자들은 『본초강목』의 영향을 받아서 같은 유형의 본초서적을 편집하는 사람도 많았다. 왕앙(汪昻)은 『본초비요(本草秘要)』, 막희(莫熺)의 『본초강목적요(本草綱目摘要)』, 조학민(趙學敏)의 『본초강목습유(本草綱目拾遺)』, 임기룡(林起龍)의 『본초강목필독(本草綱目必讀)』, 조국암(曹菊庵)의 『본초강목만방류편(本草綱目萬方類編)』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근대의 저명한 영국의 과학기술사가 죠셉 니담(Josep Needam)은 이시진을 약물학계(본초학)의 왕자(Prince)라고 칭찬하며, 이시진의 명성과 그 업적은 인류가 계속되는 한 그 역사에 새겨져 있을 것이다.
(사진, 이시진의 치료소).
『본초강목』 이외에 이시진은 『빈호맥학(瀕湖脈學)』과 『기경팔맥고(奇經八脈考)』을 저술했다. 이러한 책은 오늘날에도 맥학과 경락학설에 귀중한 문헌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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