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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수학사

레오폴드 크로네커(끝)

by 貧者一燈 2018. 8. 9.

크로네커가 풀려고 한 <청춘의 꿈>대한 증명은 크로네커의 자신의 손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 후에 高木 貞治의 유체론(類體論)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나이든 만년(晩年)의 크로네커는 <타원함수의 이론>을 제목으로 하여
22편에 이르는 길고 뛰어난 논문을 연속적으로 계속하여 썼다
마지막 제22논문이 과학아카데미에 보내서 읽었는 때가 1890년 7월 31일이었다
<일반적인 복소수(複素數)에 대해서도 모듈러와 유사한 것을 발견하다>
(1890년 3월 15일에 데데킨트에게 보낸 편지)는 것도
거의 모두 크로네커의 시야의 범위안에 있었고, 그것이 노리는 목표는
고차멱잉여상호법칙(高次冪剩餘相互法則)의 증명이었다


대수방정식과 타원함수론이 혼연일체로 융합하여 낭만적인 아름다움이
곳곳에 존재하는 수론(數論)의 세계가 이렇게 하여 활짝 열리게 되었다


1890년 9월에, 독일수학자협회가 설립되었다
칸토르(G Cantor)는 창립회원 중에 한명이었다 1891년 9월에, 독일의
할레라는 도시에서 최초의 정식 모임이 개최되었을 때,
크로네커와 수학사상(數學思想)이라는 점에서 대립이 엄청나게 증가했는데도
불구하고, 칸토르는 크로네커에게 경의(敬意)을 표하고,
크로네커가 꼭 참석하도록 재촉하였다 그러나


크로네커의 부인이 산악사고(山岳事故)로 큰 부상을 입어서, 1891년 8월 23일
사망하게 되는 일이 발생하였기 때문에, 출석할 수가 없게 되어서, 그는
9월 18일에 칸토르 앞으로 긴 편지를 써서 그러한 상황을 이야기했다
크로네커는 칸토르의 무한집합론(無限集合論)에 대하여 이해를 표시하지 않았지만,
칸토르를 괜히 싫어할만한 이유가 없었다


강연의 의뢰를 받아서 이것을 받아들여서 행하려고 했다
그 제목이 <아이젠쉬타인(Eisenstein)에 대하여> 또는 <아이젠쉬타인에 대한 추억>
인 강의를 하려는 생각이 있었다고 한다
같은 해 12월 29일에, 크로네커는 베를린에서 죽었다


  (...번역의 끝...)




(수학자와 수학사를 공부하다보면

 각 나라마다 그 서술방식과 마음가짐의 쓰임새가 서로 다릅니다

 영국과 미국 (그리고 한국마저)은 수학자라는 한 인물을 논평할 때에

 어떻게 해서든지 주의를 끌게하려고 하고 

 또한 단점이나 약점을 꼭 끄집어 내어서

 한마디로, 불평과 불화를 조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추적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칸토르와 크로네커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대체적인 이 둘의 관계는

 서로간의 수학적 철학이 달라서 다투고 불화로 인하여

 칸토르가 결국 정신병에 걸린다고 대부분 서술하고 있습니다

 어느정도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수학자를 평가하고 끝나버립니다

 그렇게 끝나면 크로네커가 아주 나쁜 사람으로 인식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수학자나 수학사가(數學史家)들은

 대체적으로 불화보다는 화(和)를 강조하고 또한 장점(長點)을 부각시킵니다

 서로 싸움을 시켜서 가까이서 바라보면서 즐기려는 것과는

 달리 화해를 시키려고 합니다

 대체로 일본의 수학사에서 이런 면이 많이 나타납니다


 크로네커와 칸토르의 관계도 영국미국의 수학관과 그것을 따르는 한국은

 불화와 싸움, 갈등과 경쟁 그리고 천재를 논하기 좋아 합니다

 이러한 수학사의 기술방법은 참으로 안 좋은 것입니다


 이책에서도 이 두분의 수학자에 대하여

 충분히 알고 있고 또한 끝까지 연구했음에도 불구하고

 크로네커와 그 제자 칸토르의 관계를 잘 좋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어떤 수학사에 대한 일본어의 책을 보면...

 나이가 훨씬 많고 수학적 업적도 많이 있는

 스승인 크로네커가 그의 제자인 아픈 칸토르의

 병문안까지 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하모니(Harmonie)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